가야사. 김해를 가야(伽倻) 너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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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유적지

수로왕 영정
  • 사적 제73호
  • 소 재 지 : 서상동 312번지

김해의 상징적 문화유적으로서 가락국 시조대왕의 능이며 납릉이라고도 합니다.
수로왕은 서기 42년 음력 3월 3일 구지봉에 탄강하여 3월 15일에 즉위 함으로서 가락국을 건국하였고 서기 199년 3월 20일에 세상을 떠나 이곳에 묻혔습니다. 서기 48년 인도 아유타국 공주인 허황옥을 왕비로 맞았으며 우리나라 김해김씨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왕릉의 외형은 원형 봉토분이고 봉분의 높이는 약5m로서 선조 13년 수축하고 인조 25년 능비를 세웠습니다.
비에는『가락국 수로왕능(駕洛國 首露王陵)』 이라 각자(刻字)되어 있습니다.

신도비에 새겨진 태양문양과 납릉정문의 신어상, 파사석탑문양, 코끼리상 등이 인도와의 문화교류를 알려주는 단서가 되고 있습니다.

수로왕릉 전경 태양문양 신비도 납릉정문 신어상

왕릉은 선조 13년(1580년)에 영남관찰사 허엽이 릉을 수축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고 수로왕의 신위를 모신 숭선전에서 춘추로 제향을 올리고 있는데 숭선전 제례는 지방 무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수로왕비 영정
  • 사적 제74호
  • 소 재 지 : 구산동 120번지

수로왕비는 원래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로서 이름은 허황옥이며 수로왕 7년인 서기 48년에 16세의 나이로 배를 타고 가락국에 도착하여 왕비가 되었고 서기 189년에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현재의 릉은 조선 인조 19년에 수축되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외형은 원형 봉토분으로 봉분의 높이는 약5m 입니다.

왕비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열 아들중 두아들을 어머니의 성인 허씨를 따르게 하여 김해허씨의 시조가 되었다. 나머지 아들중 일곱은 외삼촌인 장유화상을 따라 지리산 칠불암에 출가, 모두 부처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수로왕비릉 전경 수로왕비릉 전경
대성동 고분군
  • 사적 제341호
  • 소재지 : 대성동 434번지

이 고분군은가야의 건국설화가 깃든 구지봉(龜旨峰)과 김해패총 (金海貝塚)으로 유명한 회현리패총의 한 가운데에 위치하며, 동쪽으로 인접하여 김수로왕릉이 있다. 즉, 공설운동장 의 바로 북쪽 뒷편에 표고 22.6m의 '왜(애)꼬지'라 불리는 구릉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이 유적은 1990년에서 1992년까지 3차에 걸친 경성대학교 박물관의 학술 발굴에 의하여 금관가야 지배계층의 무덤을 중심으로 한 2~6C 금관가야의 집단묘역으로 밝혀졌다.

입지조건이 좋은 구릉의 능선부 에는 왕묘와 이에 상응하는 지배자의 무덤이, 경사면에는 보다 신분이 낮은자들의 무덤들이 형성 되어 있었다.

대성동 53호분 대성동 27호분

특히 금관가야의 지배계층묘로 보이는 나무곽무덤(목곽묘)에서 풍성한 철기 문화와 강력한 기마군단을 가진 가야문화의 실체를 알 수 있는 다양한 유물들과 후한대의 중국제 거울을 비롯하여 일본의 고분에서 보이는 통형동기, 파형동기 등이 출토되어 한,중,일 삼국간의 문물 교류 상황을 밝히고 있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대성동 13호 청동거울조각 대성동 13호 석제품 대성동 18호 투구
복천동 고분군
  • 사적 제273호
  • 소재지 : 부산광역시 복천동 50번지

복천동 고분군은 구릉의 원래 이름을 따서 학소대(鶴巢臺)고분군 이라고도 합니다. 가야고분(AD 1-5C)으로 향토문화 변천 및 일본과의 관계규명 등을 밝힐 수 있는 주요유적입니다. 또한 역사를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는 삼한시기의 중요한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어 당시 이 지역의 문화수준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지역의 지배자 집단의 묘역인 것으로 보이는데, 무덤의 형식은 크게 덧널무덤[木槨墓] ,구덩식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墓],앞트기식돌방 무덤[橫口式石室墓]과 독무덤[甕棺墓]이나, 덧널무덤과 구덩식돌덧널 무덤이 주가 됩니다.

대형묘는 구릉의 정상부를 따라 능선의 진행방향 (등고선과는 직교하는 방향)으로 입지하며 중소형묘는 구릉 사면에 등고선을 따라 분포하는 것으로 보아, 사회적인 계급에 따라 고분의 위치를 달리하여 조성된 것으로 보임니다. 발굴된 상당량의 토기는 신라 ,가야 토기 편년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또한 특징적으로 갑옷 ,투구가 많이 출토되었습니다

복천동 53호분 복천동 30호 손잡이접시 복천동 32호 뿔잔,받침

갑옷,투구 이외에도 말갑옷[馬甲], 말머리가리개 등 철로 만든 무기가 상당수 출토되어서 당시 말을 이용하여 전투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매장시설의 바닥에는 덩이쇠[鐵鋌]가 1~3열씩 깔리기도 하였습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변한조에 철을 화폐 대신으로 쓴다는 기록이 있는데, 덩이쇠가 다른 철제용품을 만드는 재료의 역할을 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당시 화폐로 쓰였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지산동 고분군
  • 사적 제 79호
  • 소재지 : 고령군 고령읍 지산 산 8

고령은 5c후반 이후 낙동강 서안을 거점으로 한 후기 가야제국의 맹주인 대가야가 위치하였던 곳으로 지산동 고분군 발굴을 통하여 대가야의 면모를 살필수 있습니다.

고령 중심부에 있는 주산에 위치한 지산동 고분군은 돌덧널 무덤군입니다. 특히 44, 45호분의 경우, 부곽의 주위에 소형곽들이 정연한 배치양상을 보여 왕이나 왕족의 무덤으로 생각됩니다.

이들 돌널무덤에서는 피장자의 신분을 시사하는 금동관, 귀걸이 등의 장신구 와 삼엽환두대도, 은상감환두대도, 갑옷, 투구, 어깨가리개등이 출토되었고, 이들 고분에서 출토된 토기(고령계 토기)와 유사한 형태의 토기들이 합천, 함양, 남원등지에서도 보이고 있어 대가야의 세력판도를 엿볼 수 있게 합니다.

지산동 30호분 고령지산동그릇받침 고령지산동굽다리접시

이 고분군은 고령읍의 서측에는 고령의 지산(眞山)이라 일컫는 주산(主山:해발 310.3m) 에 위치하는 봉토분이 있습니다. 주산은 주능선이 남북으로 뻗어 있고 거기서 사방 으로 지맥이 뻗어 있습니다. 남북으로 뻗는 주능선과 동으로 뻗는 지맥들의 능선 상부에 157기의 封土墳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남아 있는 봉토분들의 봉분은 대부 분 원형(圓形) 이고 크기는 다양하여 직경 10m 내외의 것에서부터 40m 이상의 것 이 있습니다. 고분군의 대형분들은 경주 황남동 일대의 대형분(大形墳) 들을 제외하면 영남지방에서 가장 큰 규모를 가진 것으로 대가야의 왕족 또는 귀족들의 무덤임이 확실하다. 또 현재 호암미술관에 소장된 금관(金冠)이 이 고분군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이 금관은 경주지역 이외에서 출토된 단 하나의 금관으로 유명합니다.

수로왕릉/왕릉비의 보존

금관국의 수로왕릉과 왕비릉이 설치되고 보존되어 온 경과

금관국(金官國)은 멸망하였지만, 수로왕릉(首露王陵)은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수로왕릉은 어떤 연유로 인하여 만들어졌고, 또 어떻게 지금까지 보존되었으며, 그것은 실지로 수로왕의 능일까요?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의하면, 수로왕릉은 서기 199년에 조성되었으며, 당시에는 수로왕릉 옆에 편방(便房)이라는 작은 건물만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시기의 고분은 대개 목곽분이고 낮은 봉분을 가지고 있으므로 지금의 모습처럼 생길 수는 없습니다. 지금의 위치에 수로왕릉이 조성된 것은 신라 문무왕 원년(661)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문무왕은 왕위에 오른 직후, 교서를 통하여 ‘수로왕은 나에게 외가(外家)로 15대 조상에 해당하므로 그를 종묘(宗廟)에 모시라’고 명하였습니다.

수로왕릉 전경 수로왕비릉 전경

그런데 이는 요즘과 같은 종묘가 아니라 무덤 앞에 사당을 세우는 형태였습니다. 그래서 수로왕릉 앞에 사당(廟)을 신설하면서 봉분도 크게 성토하였다고 추정됩니다. 이 때 수로왕릉의 위치는 조금 변경되었을 수도 있고, 그 내부 구조도 당시의 신라 왕릉 양식인 횡혈식 석실분으로 새로이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수로왕비릉 비석

이렇게 확립된 수로왕릉과 사당은 신라 말 고려 초를 거치면서 신흥 지방호족의 도전, 도적 떼의 습격, 고려 조정의 압박 등을 거치면서도 규모를 대체로 유지하였습니다. 이는 그 지방의 수로왕 후손들이 고려 시대까지 상당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2세기 중후반의 문종 때에는 다시 수로왕릉과 왕비릉을 보수하고 비문을 건립하는 등 대대적인 보수 작업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수로왕릉 주변은 고려 후기에 들어 몽고와 왜구의 침략으로 인하여 고려 후기부터 조선 초기까지 수백 년간 황폐화되었습니다. 조선 개국 후 세종 21년(1439)에 수로왕릉이 논에 잠겨 있고 허물어진 왕릉의 분구 위에 소나 말을 놓아기른다는 경상도관찰사의 장계에 의하여 겨우 수로왕릉의 묘역이 사방 30보 확보되었습니다. 그리고 15세기 말엽 성종 대에는 이 지방 출신 사림(士林)의 주도 아래 회로당(會老堂)과 재실(齋室)이 건립되었습니다.

『지봉유설』의 기록에 의하면, 수로왕릉은 임진왜란 때 왜구에 의하여 도굴되었는데, 구덩이 안은 매우 넓었고 두개골은 대야만큼 컸으며, 관 바깥에 순장한 것으로 보이는 두 명의 미인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이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인조 24년(1646)에 비로소 수로왕릉과 허왕후릉의 능비(陵碑)와 생석(牲石)이 세워졌습니다.

그 후 대를 거듭하면서 수로왕릉의 부속 건물이 조금씩 늘어났고, 정조 17년(1793)에 당시 이 지방 주민들의 민원을 수용한 정조의 허락으로 거의 모든 건물들이 새로이 건축되어 납릉정문(納陵正門), 가락루(駕洛樓)와 같은 전각들의 원형이 조성되었습니다. 그 후에도 여러 건물들이 건립되고 수리되다가, 고종 15년(1878)에 사당 건물인 숭선전(崇善殿)이 임금의 사액(賜額)을 받음으로써, 옛 가락국 왕릉과 종묘의 제도가 재확립되었습니다.

남릉정문 숭선전 가락루

한 시대에 한반도 전체를지배하던 신라나 고려, 조선의 왕릉들이 현재까지 유지되어 전해오고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전기 가야연맹의 맹주국 시조인 수로왕과 그 왕비인 허왕후의 능이 지금까지 제사지내지면서 전해 내려온다는 것은 기이한 일에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그 양릉(兩陵)에 제사지내는 집단, 즉 가락국의 왕족이 국가 멸망 이후 신라 및 고려, 조선 시대의 1,500년을 거치면서 해당 지방의 패권을 장구하게 유지해 왔으며 중앙 정권으로부터 그러한 존재를 인정받아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김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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