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사. 김해를 가야(伽倻) 너를 만난다


현재 위치

Home > 가야사 > 박물관 > 가야고분

가야고분

김해 지방 고분군의 분포 상태 분석

70년대 이후 꾸준히 증가된 발굴조사 성과와 새로운 문자 기록자료의 발견으로 가야사에 대한 관심 증대 및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져 왔습니다. 특히 김해 지역은 금관가야 시기의 생활유적과 분묘유적이 많이 존재하고, 발굴조사가 많이 진행되어 금관가야의 발전과정이 서서히 해명되고 있습니다. 생활유적이든 분묘유적이든 유적의 수는 곧 김해지역에 거주했던 집단의 수를 나타내며, 유적의 규모는 집단의 크기를, 유적의 존속기간은 곧 집단의 거주 기간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유적의 규모와 그곳에서 확인된 유구의 규모, 출토된 유물의 다과와 화려함은 김해 지역에 거주했던 집단간의 우열을 나타냅니다. 특히 발굴조사가 많이 진행된 고분군은 고분군을 구성하는 개개 고분과 그곳에서 출토된 유물은 여러 가지 정보를 우리에게 제공해 주며, 사회발전 과정, 특정 세력권의 범위, 사회조직, 교류관계 등이 복원되기도 합니다.

김해 지역의 집단들은 작은 분지를 관통하는 하천 또는 섬을 단위로 수 개의 지역으로 분리된 상태로 존재하였습니다. 양동리 분묘군이 있는 조만천변, 봉황대 취락, 회현리 패총, 대성동-구지로 목관묘군이 있는 해반천변, 진례평야, 사촌천변 등에 위치한 집단으로 구분됩니다. 구야국 시기에는 이들 지역이 하나로 통합되지 않았으나 해반천변의 대성동 집단이 우세집단으로 등장하면서 대성동 집단을 정점으로 피라밋 구조를 이루는 형태를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낙동강 이동의 동래 지역에 있는 독로국과 연맹을 맺어 지지 기반을 두텁게 하고, 4세기 후반에 진영과 창원분지, 진해,마산만까지 세력을 확장시키고 각 집단들을 통합하게 되었습니다.

양동리고분군 대성동고분군 구지로고분군

한 특정집단에 의해 주변의 여러 집단들이 통합되면서 집단간에 차등이 심화되며, 그러한 차등이 분묘에도 반영되었습니다. 김해 지역의 분묘에 차등이 나타나는 것은 목관묘가 만들어지는 시기부터이며, 이후 점차 차등의 속도가 가속되고 강화되어 갔습니다. 금관가야 시기가 되면 최상층은 규모가 큰 무덤을 만들고, 그 안에 갑옷, 투구, 환두대도, 통형동기, 철정 등 진귀한 물품과 순장자를 부장하였습니다. 그 아래의 집단들은 최상층보다 다소 격이 떨어지는 유물을 부장하였으며, 이들은 전체의 극히 일부를 차지하였습니다. 이보다 더 아래의 고분군은 토기와 간단한 농공구류를 부장하고, 각각 작은 하천과 해안가에 위치하면서 금관가야의 토대를 이루었습니다.

갑옷 투구 환두대도 통형동기 철정

특정 집단에 의한 통합은 자연히 인접 지역과의 마찰을 불러오기도 하면서 싸움의 수가 늘어나고, 싸움의 목적도 달라지며, 그것이 조직적으로 이루어지면서 군대 조직이 성립합니다. 3세기 후반의 김해 지역의 집단들은 개별 단위 집단마다 무기 소유의 독자성이 어느 정도 인정되었으며, 이는 특정 집단이 일정 범위내의 개별 단위 집단의 무기 소유를 제한하거나 인력을 편제할 수 있는 군사 조직이 성립되지 않았음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4세기에 들어오면서 초보적인 군사 조직이 이루어지고, 초월적 집단의 주도하에 전쟁이 수행되는 단계로 진입합니다. 또 하위집단의 여성들에게는 무기소유가 금지되는 등 성적 차별화가 진전되었습니다.

집단의 통합과 각 집단간의 차등이 이루어지는 등 초보적인 국가체제가 마련되면서 그들이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민과 영토도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이 당시의 영토는 지금과 같이 명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고배

금관가야 시기의 영토는 3세기 이래 계속 확장되면서 4세기 후반에 들어와 최대를 이루는데, 그것을 나타내는 자료가 아가리가 밖으로 꺾인 고배(외절구연고배, 外折口緣高杯)입니다. 외절구연고배는 4세기 후반 초에 처음으로 등장하며, 말경이 되면 동으로는 철마 고촌리 고분군, 서로는 진해 웅천 패총, 창원 가음정동 고분군과 도계동 고분군에까지 분포합니다. 이 외절구연고배의 분포 범위가 금관가야의 최대 영역을 나타냅니다.

금관가야가 최대 영역을 나타내는 시기는 4세기 후반이고, 그 범위를 보면, 동으로는 철마-해운대, 북으로는 낙동강, 서로는 가음정동-도계동-웅천으로 연결되는 지역입니다.

그리고 금관가야는 낙동강의 하구와 바다를 낀 지정학적 이점을 이용하여 주변의 여러 나라와 활발한 교류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그러한 흔적들을 무덤의 부장품속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무덤에는 주변지역 또는 다른 나라에서 만든 유물이 묻혀있는 예가 종종 발견됩니다. 이런 유물들의 생산지를 추정하여 당시 사람들의 대외활동, 물자의 수입과 수출 등을 알 수 있습니다. 고대의 김해는 바다에 접해 있을 뿐만 아니라 낙동강을 끼고 있어 내륙 깊숙이 들어가 다른 지역에서 생산된 물품을 내륙의 집단들에게 공급하고, 내륙에서 생산된 여러 가지 물품들을 해외로 수출하는 등 중개 무역의 항구였으므로, 그곳의 금관가야가 중개 교역국가로 활동하였음을 보여주는 유물이 무덤에서 많이 출토되었습니다. 양동리와 대성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중국거울,청동 솥,철 솥 등의 중국제 유물, 청동 솥과 같은 북방유물 광형동모,방제경,야요이 토기,석제 유물, 파형동기 등의 외제(일본제) 유물이 있습니다.

청동솥 방제경 파형동기 야요이토기 광형동모 석제유물

이상과 같이 고분이란 그 당시 사람들이 후세에 남기고자 한 기념비이지만, 고분군의 분포와 규모, 존속기간, 고분의 규모와 부장품의 질과 양 등을 통하여 그 당시 사회의 일면을 복원할 수 있는 중요한 역사 자료임은 분명합니다.

<홍보식>

본문 콘텐츠 담당자

담당자
문화재과 055-330-3921  

본문 유틸리티

Quick menu

  • 관광안내센터
  • 사이버투어
  • 교통정보
  • 숙박정보
  • 음식정보
  • 관광책자신청
  • 김해관광할인쿠폰